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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영어 잘해야 돈 잘 벌고, 돈 있어야 영어 잘 가르쳐
이 름 :
임고야 작성일 : 2007년 03월 15일 12시 48분
     
 
영어 실력이 신분을 가르는 시대... 사교육 과열로 빈부격차 따른 영어격차도 심화

서울 성북구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종민(14)이는 요즘 방과 후에 놀 시간을 빼앗기는 게 짜증난다. 담임 선생님이 영어 못하는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1시간씩 영어공부를 시키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워온 중학교 1학년생이지만 종민이의 영어실력은 교과서를 더듬거리며 읽기도 힘든 수준이다. 알파벳은 알지만 그게 서로 모아져서 어떤 소리로 발음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종민이는 “선생님이 교과서를 읽으라고 하면 대충 들어본 통박으로 아무렇게나 읽는다”며 “영어 공부를 위해 학원에 다니거나 학습지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종민이는 “학원에 다니면 급식비를 학교에서 지원받지 못한다. 아버지 어머니 다 공장에 다니고 할머니랑 생활한다”고 했다. 현재 교육당국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만 급식비를 지원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휴대폰을 갖고 있는 학생’에게는 급식비를 지원하지 말도록 각 학교에 지시하고 있다.
종민이말고도 같은 반에서 방과 후 영어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10여명에 이른다. 종민이 담임인 강모(38) 교사는 “반 영어성적이 너무 형편없어서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읽어보게 했더니 3분의 1 가량이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단어시험을 보면 알파벳을 거의 그리는 수준의 아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강 교사는 “한 달 5만원의 급식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원어민 학원이다, 어학연수다 하는 얘기는 그야말로 딴 나라 일”이라며 “나이어린 아이들이 벌써부터 영어 때문에 낙오자가 될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서울 압구정동에 사는 초등학생 5학년생 은미(12)는 요즘 영어에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본래 학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실력이지만 작년 1년간 미국에 연수를 가서 미국 아이들과 똑같이 공립학교를 다닌 게 더욱 자신감을 붙게 만들었다. CNN 뉴스를 들으면 뜻을 모르는 단어들이 아직 많지만 문장이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온다. 미국 생활을 오래한 부모도 미국 친구들과 쓰던 신세대 영어를 구사하면 대견스러워한다. 어학연수는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서 본인이 욕심을 낸 것이고, 부모들도 “어릴 때 영어를 잡아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국립대 교수인 아버지 김모씨는 “딸이 타지에서 고생했지만 이제 영어는 생존의 필수도구 아니냐”며 “한 번 더 연수를 보내 영어를 완전히 잡아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영어 낙오자’의 양산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 ‘영어 격차’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신조어가 갖는 의미가 날이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다. 디지털 혁명 시대에 정보 소외계층의 출현을 가져온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처럼 영어 필수 시대가 찾아오면서 ‘영어 낙오자’의 양산이 우리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특히 잉글리시 디바이드는 ‘영어 태교 서비스’까지 출현한 우리의 사교육 광풍(狂風)으로 인해 어린 세대에는 더욱 가혹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유아기 때부터 영어교육에 투자를 하는 부유층 자녀와 이를 쳐다봐야만 하는 사교육 소외계층의 자녀 사이에는 뛰어넘기 힘든 장벽이 가로막아설 수밖에 없다.



‘영어 격차’ 문제는 “영어 못하는 세상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말이 이젠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면서 의미심장해지고 있다. 이미 사회 각 부문에서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간에는 차별이 존재하며 대접이 달라지는 세상이 돼버렸다. 한화증권 이종우 리서치센터장은 “IMF 이후 증권업계에서는 국내외 업무 간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영어구사 능력은 1류냐, 2류냐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며 “영어 프리미엄이 연봉 20%의 차이를 가져오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영어문서 작성과 영어 프리젠테이션이 상시적으로 요구되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에게는 요즘 재계약 여부의 중요 조건으로 영어 능력이 꼽히고 있다. 잡코리아(www.jobkorea.co.kr)가 얼마 전 국내 주요 대기업 179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대기업 면접절차 조사’에 따르면 응답회사들의 11.7%가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영어 면접을 필수적으로 보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IMF 이후 외국 자본이 대거 국내로 진출하면서 회사에서의 영어회의는 일상적인 풍경이 됐고 승진을 앞둔 대기업 간부들이 영어 실력을 쌓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것도 전혀 낯설지 않게 됐다. 지난 6월 채용포털 커리어(www.career.co.kr)가 직장인 1232명을 대상으로 ‘입사 후 가장 부족한 능력 및 자질’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7.2%가 ‘외국어 능력’을 꼽았다. ‘대인관계 개선’(16.6%), ‘컴퓨터 활용능력’(12.4%), ‘프리젠테이션 능력’(8.8%) 등 어떤 항목보다 외국어 능력이 우선이었다.

이러한 영어의 득세(得勢)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트렌드임은 명확하다. ‘10년 후 한국’을 쓴 ‘공병호 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은 “지식중심 사회가 되면서 쓸 만한 정보가 영어로 기록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고, 영어 네트워크에 편입되느냐 못되느냐가 부가가치 창출의 능력을 결정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다소 과장하면 “영어가 일종의 권력과 계급을 구분짓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어와 스페인어 등이 영어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영어의 위상은 확고하다.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80%가 영어로 돼 있고 국제기구의 85%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영어는 51개국에서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공식어로 지정한 나라도 70개국이나 되며, 100여개 국가에서 가르치고 있다. 10년 후면 현재 8억~10억명에 이르는 영어 사용인구가 30억명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잉글리시 디바이드는 ‘영어의 미래’를 확신하는 사람들의 사교육에 대한 투자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강하다. 나날이 발전하는 영어 사교육이 공교육을 초라하게 만들고 이것이 다시 사교육 시장으로 소비자들을 내몰아 영어의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고 있다.

영어 사교육 시장 규모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연간 10조원 가까운 수준을 파악되고 있다. 민선식 YBM시사 사장은 “원어민 강사 확보 비율과 우리회사 매출로 추산하면 국내 영어학원 시장은 대략 2조원 규모로, 외국 유학ㆍ연수 비용까지 합하면 대략 10조원 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어 학원 수는 지난 10년간 2배 가량 늘었고, 시장 규모는 10배로 뛰었다는 것이 민 사장의 진단이기도 하다.


▲ 지난 여름방학 기간 해외 연수를 가기 위해 인천 공항에 몰린 학생들.
사교육 시장 연 10조원

한국은행 추산에 따르더라도 작년에 우리나라 사람이 쓴 해외 유학ㆍ연수비는 동반 가족의 생활비를 포함해 7조3800억원으로, 올해는 이 돈이 10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물론 대부분이 미국 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에 쏟아부은 돈이었다. 동반 가족 생활비를 제외한 순수한 유학ㆍ연수비 역시 2003년 18억5000만달러에서 2004년 24억9000만달러로 34.6%가 증가했고, 올 1∼8월에만 22억50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2%가 느는 등 급증하는 추세다.

이러한 영어 사교육 시장에서 계층ㆍ지역 간의 격차는 뚜렷하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지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해 30일 이상 해외에서 어학연수를 한 초·중·고교생은 모두 7481명으로, 이 중 서울지역 학생이 전체의 35.3%(2640명)를 차지했다. 특히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 학생만 전체의 10.6%, 서울시의 30.2%인 796명을 차지했다. 이는 광주와 전남북을 다 합친 372명의 2배가 넘는 수치다.

최근 통계를 보면 소비성 지출 가운데 빈부격차가 가장 큰 항목은 사교육비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분기 소득 상위 10%의 가정이 월 사교육비로 지출한 돈은 29만2000원으로 소득 하위 10% 가정의 월 사교육비 지출액(3만6000원)의 8배에 이르렀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제출한 ‘한국인의 소비구조 변화’ 보고서는 “소득 상위계층의 교육비 지출이 하위계층보다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며 “현 세대의 소득 격차가 교육 투자의 차이로 이어져 계층간 소득 격차가 대(代)를 이어 고착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상류층의 사교육 투자를 좇아가려는 중산층 주부들이 가장 고민하는 사교육 항목은 다름 아닌 영어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사는 주부 강모(34)씨는 “내년에 학교에 들어갈 딸을 이름난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있다”며 “영어 교육에 다소 무리한 지출을 하다보니 수학은 학습지를 활용해 내가 대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사는 주부 최모(35)씨 역시 사교육비 중 영어에 들어가는 돈이 가장 많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내년 취학을 앞둔 딸의 영어 사교육을 위해 쓰는 돈만 한 달에 110만원 가량이다. 매달 가계 수입의 거의 3분의 1을 영어 사교육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최씨는 “매달 70만원 가까운 영어 유치원과 매달 30만원이 들어가는 영어 학원, 그리고 이웃이 권한 영어 학습지까지 아이들에게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유아ㆍ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사교육 시장은 별다른 규제가 미치지 않는 치열한 자유경쟁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지난해 11월 서울의 각 지역교육청 수강료조정위원회가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영어유치원 수강료의 상한선을 월 69만원으로 정했지만 월 수강료가 100만원을 넘나드는 고급 유치원들이 다시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평균 소득 격차가 존재하는 도시와 농촌 간에도 잉글리시 디바이드는 실재한다. 호남영어교육학회가 펴내는 ‘Studies in English Education’ 2003년 여름호에 실린 ‘농촌지역의 초등영어교육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 간 영어 격차는 뚜렷했다. 예컨대 ‘학교 정규과목인 영어수업 이외의 다른 형태 영어과외 교습을 시키느냐’는 질문에 도시 지역 학부모들은 91.9%가 ‘그렇다’고 대답한 반면 농촌지역 학부모들은 51.9%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정규 교과 외의 영어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도 도시 지역은 매달 11만3566원인 반면, 농촌 지역은 7만4971원에 그쳤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도 심각

이러한 부모들의 영어 사교육 투자 격차는 아이들의 영어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영어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가가서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질문에 도시지역 학생은 62.7%가 ‘그렇다’, 37.3%가 ‘그렇지 않다’고 답한 반면, 농촌지역은 48.7%가 ‘그렇다’, 51.3%가 ‘그렇지 않다’고 답해 영어에 대한 자신감에서 차이가 나고 있음을 보여줬다. 또 ‘영어수업이 재미있다’는 답도 도시(62.7%)와 농촌(48.3%) 간 학생들 사이에 차이가 났다. 이 조사 논문은 도시와 농촌 학생 간 영어과외 참여 비율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농촌지역에서 학교 영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는 수치”라고 강조했다.

이 조사가 전북지역 내 농촌과 도시지역 초등학교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임을 감안하면 사교육 1번지인 서울 강남과 농촌 지역까지를 포함한 전국적인 영어 격차는 훨씬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 9월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교육격차 실태 및 해소방안’에 따르면 외국어 영역(80점 만점)의 경우 광역시가 49.63점으로 읍면지역 31.18점보다 18점이나 높았다.

전병만 한국영어교육학회 회장(전북대 교수)은 “잉글리시 디바이드는 결국 공교육에서 메워줄 수밖에 없는데 현재 영어교육의 절대량부터 부족하다”며 “초등학교 영어 수업시간을 지금보다 2~3배 늘리는 등 국가정책적으로 영어교육에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장열 주간조선 기자 jr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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